1. 수첩 속 첫 장, 늘 같은 시작
“오늘도 공소 문을 엽니다.”
평신도 회장 김 회장님의 수첩은 항상 이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이른 새벽, 바람이 차가운 날에도 그분은 먼저 나와 불을 켜고, 조용히 성체 앞에 앉아 기도하곤 하셨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낡은 노트지만, 이 수첩은 김 회장님에게는 공소의 하루를 여는 ‘열쇠’였습니다.
그 속에는 평범한 날들이 하나하나 적혀 있습니다. 어떤 날은 청소를 도운 초등학생 이름이, 어떤 날은 아픈 교우의 안부가, 또 어떤 날은 비 오는 날 미끄러워 넘어질까 걱정한 어르신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기록들은 숫자도, 명예도 아닌 사람을 기억하는 신앙의 언어였습니다.
2. 사제 없는 공소, 모두의 손으로 지켜낸 믿음
우리 공소에는 신부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신자들이 함께 준비합니다. 그 중심에 계셨던 분이 바로 김 회장님입니다. 미사 대신 주일예절을 준비하고, 강론 대신 복음을 함께 읽고 나누는 자리에서도 늘 조용히 중심을 잡아주시던 분이죠.
특별한 자격이 있었던 것도, 누가 시켜서 맡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누군가 해야 한다는 마음, 그리고 하느님 앞에 드리는 작은 책임감에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수첩에는 한 해의 절기마다 어떤 말씀을 나눴는지, 어떤 음식으로 작은 나눔을 했는지 적혀 있었고, 어느 날엔 글씨 옆에 작은 감탄사처럼 "은총 가득한 날"이란 말이 삐뚤빼뚤 적혀 있기도 했습니다.
그 수첩을 보면, 신앙은 꼭 커다란 성당 안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누군가의 일상과 손길 속에서 조용히, 하지만 분명히 피어나는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3. “기도합니다”라는 말 대신 적어놓은 마음들
김 회장님의 수첩은 참 따뜻합니다.
“홍 아저씨 눈이 많이 부으셨다. 어제는 말씀이 없으셨다. 주님, 위로해 주소서.”
“지영이 엄마 남편, 아직 병원에 계심. 내일 반찬 조금 더 챙겨가자.”
“초등부 친구들, 시험기간이라 못 나옴. 수고했다 문자 보낼 것.”
이런 메모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지만, 회장님은 그렇게 하루의 자투리들을 기억했고, 그 기억은 늘 기도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수첩은 단지 기록만이 아니라, 회장님 자신을 다독이는 기도문이자 감사일기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이런 글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다섯 분밖에 오지 않으셨지만, 감사한 날. 하느님이 나를 먼저 불러주신 날을 잊지 말자.”
어떤 신앙보다 따뜻하고 깊은 고백이 아닐까요?
4. 공소를 떠나며, 마지막 장에 남긴 말
최근 건강상의 이유로 김 회장님은 회장직에서 물러나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아쉬워했지만, 회장님은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소는 나 하나로 되는 게 아니었어요. 함께 기도해주신 분들이 계셨기에 여기까지 온 거죠. 이젠 젊은 분들에게 자리를 내줄 때가 되었네요.”
그리고 수첩 마지막 장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자주 부족했지만, 하느님은 한 번도 부족하지 않으셨다.”
마무리하며: 당신의 손에도 수첩 하나 있나요?
우리는 거대한 건축물이나 화려한 미사보다, 한 사람의 조용한 수첩에서 더 깊은 신앙의 진심을 만납니다.
김 회장님의 수첩은 그렇게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오늘, 누구의 이름을 기억하고,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