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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 길을 걷는 순례자의 기도

by mcstory7 2025. 5. 21.

우리는 가끔 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조용한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합니다. 누구의 시선도, 소음도 없는 곳. 오로지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을 그리며...

그런 마음으로 떠난 여행에서 나는 어느날 한적한 시골 논두렁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지도에조차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좁은 흙길이었지만, 그 길 위에서 나는 기도의 참된 의미를 다시 배웠습니다.

어떤 화려한 성지도 아니었고, 특별한 성당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걷는 동안, 나는 분명 하느님과 단둘이 걷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 일러스트

1. 마을 끝 논두렁에서 시작된 느린 발걸음

햇살이 유난히 부드러웠던 봄날, 나는 작은 시골 성당에서 미사를 마친 뒤, 마을 너머로 이어진 논두렁 길을 따라 아무런 생각없이 걸었습니다.

양옆으로 펼쳐진 논은 물이 채워져 있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벼 싹들이 바스락거리며 인사를 건네는 듯했습니다.

신발 밑으로 흙이 스며드는 느낌,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길가에 핀 들꽃 한 송이까지

모든 풍경이 조용한 기도처럼 다가왔습니다.

그저 세상이 한순간 조용함을 느꼈습니다.

그 길에는 십자가도, 묵주도 없었지만, 세상이 내게 말 걸어주는 듯한 따뜻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논두렁 길은 그렇게 나를 천천히 걷게 만들었습니다.

빨리 걷고 싶어도, 이 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연이 정해놓은 속도에 나 자신을 맡기고 걷는 그 순간, 나는 어느새 하느님의 시간 속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2.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나만의 기도

그 길을 걸으며 나는 소리 내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마음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누구에게는 사소하게 들릴 걱정, 설명할 수 없는 불안, 그리고 말 못한 감사그리고 내 스스로 나에게 하고 싶은 여러 가지 말들

논두렁을 따라 걷는 동안 나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나만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형식도 없고, 정해진 문장도 없는 기도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의 기도는 가장 진심 어린 고백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느님, 지금 제 모습괜찮은가요?”

조용히 이 길을 걷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한마디 한마디는 내가 내 자신에게 묻는 말이기도 했고, 동시에 하느님께 보내는 속삭임이기도 했습니다.

길 끝에 도착했을 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무엇에 감동했는지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3. 길 위의 순례자, 삶을 다시 걷다

그 논두렁 길은 그저 마을의 농로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순례길이었습니다.

아무 표식도, 가이드도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자유로웠고, 더 깊은 묵상이 가능했습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나는 힘들었던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다시 처음처럼 발걸음을 옮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돌아오는 길, 마주친 한 마을 아주머니께서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그 길 좋지요? 괜히 기분이 좋아지죠.”

나는 그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습니다.

어쩌면 그분도 알았을지 모릅니다.

그 논두렁 길이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기도하게 만드는 특별한 길이라는 걸요.

삶이 곧 순례이고, 길이 곧 기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때때로 멀리서 하느님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계십니다.

조용한 논두렁 길을 걷다가 문득 멈춰 설 때,

작은 바람 소리와 햇살 사이로 우리를 바라보며 함께 걷고 계십니다.

기도는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형식이 없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마음을 여는 순간, 우리가 걷는 그 길 자체가 기도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 속을 걷는 순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