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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인권운동에 참여한 가톨릭 신부의 기록 (정의, 용기, 신앙)

by mcstory7 2025. 5. 10.

1960년대 미국, 피부색 하나로 차별받고 억눌렸던 시대에 정의를 외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심엔 목사와 운동가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한 가톨릭 신부는 성당 강단이 아닌 거리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손을 잡고, 연행을 감수하면서까지 신앙은 곧 행동임을 증명했습니다. 이 글은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현장에서 조용히 함께 걸었던 한 사제의 기록을 통해 신앙과 사회 정의의 연결을 되새겨봅니다.

거룩한 성모마리아 조각상 사진

1. 침묵하지 않은 신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

그의 이름은 토마스 제이 게이건 신부(Thomas J. Gaughan). 백인이었던 그는 시카고 외곽의 중산층 본당에서 편안한 사목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한 흑인 소년이 그의 성당 앞에서 경찰에게 강제로 체포되는 장면을 목격하며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성당 안에서의 기도는 울림이 없었다. 밖에서 무너지는 사람들의 눈을 마주했을 때, 신앙이 비로소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믿는 하느님 사랑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나뉠 수 없다는 확신을 품고, 남부로 내려가 흑인 인권운동에 동참합니다.
그가 존경했던 트라피스트 수도자 토마스 머튼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로 하는 신앙은 공허하다. 고통 속으로 들어가야 하느님을 본다.”

그는 거리로 나섰습니다. 신부복 위에 흑인 인권운동 배지를 달고, 매일 성무일도를 외우며 평화 행진에 참여했습니다.

 

2. 셀마에서, 침묵을 깨다

19653, 미국 인권운동사에 길이 남을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알라바마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이어지는 87km 거리. 수천 명의 흑인과 백인, 목회자와 시민들이 손을 잡고 행진에 나섰고, 그 가운데 조용히 걷는 한 백인 신부가 있었습니다.
바로 토마스 게이건 신부였습니다.

그는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마이크를 잡거나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회색 신부복 위에 단 검은 인권배지는, 그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뚜렷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들과 함께 걷는다. 이들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다.”

흑인 인권운동이 한창이던 그 시기, 백인 신부가 거리에서 흑인들과 팔짱을 끼고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동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선택이자, 자신의 자리와 안전을 포기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가 함께 걸은 행진의 어느 날, 그는 몽고메리 인근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하룻밤을 유치장에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구타나 모욕은 예사였고, 동료 신부조차 등을 돌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남겨져 있습니다.
내가 함께 있었던 것은 흑인 형제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느님 앞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믿음을 위해서였다. 감옥 안에서도 주님의 기도는 쉼 없이 이어졌다.”

게이건 신부는 행진 도중 몇 차례 다리를 절기도 했지만, 마지막 날까지 걸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밤, 그는 노숙 중인 흑인 아이의 손을 잡고 말없이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는 짧았지만, 그 아이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는 그날, 하느님이 백인 신부의 손을 빌려 내 손을 잡아준 것 같았다.”

 

3. 정의는 예배당 밖에서도 살아야 한다

인권 행진이 끝나고 수년이 흐른 뒤에도, 게이건 신부는 화려한 자리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더 작고 낡은 교구를 택했고, 흑인 공동체가 모여 사는 지역의 성당에서 가장 낮은 자리, 조용한 사목자의 삶을 택했습니다.

그는 매주 주일마다 마을 아이들과 식탁을 함께 했습니다. 빵을 나누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학교에 갈 수 없던 아이에게는 연필을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설교에서는 항상 예수님의 이야기를 흑인의 삶에 빗대어 풀어냈습니다. “그분도 버림받았고, 가난했고, 이방인이셨다.” 그렇게 하느님의 이야기는 매주 조금씩 마을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게이건 신부는 말했습니다.
주일미사는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이기도 하지만, 고통받는 이웃과 다시 연결되는 약속입니다. 십자가는 성당 벽 안에만 걸려 있어선 안 됩니다.”

그는 종종 혼자서도 시위에 참여했고, 임종을 앞둔 흑인 노인을 위해 사제가 아니라 친구로 와달라는 부탁에 교복이 아닌 평복을 입고 문을 두드리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자신이 몸담았던 교회 지하의 작은 방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화려한 장례식은 없었고, 관 대신 손때 묻은 나무 의자 위에 사진 한 장이 놓였습니다. 셀마의 작은 성당 벽에는 지금도 이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그는 강론보다 침묵을, 연단보다 걸음을 선택한 사제였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따뜻한 손길과 조용한 발걸음은, 지금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진짜 신앙은 행동이다라는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