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낡은 벽, 그 위에 남은 작은 흔적
어느 시골 마을.
미사를 마치고 성당 뒤쪽 마당을 산책하다 우연히 마주친 풍경이 있었다.
그곳은 오래된 창고처럼 보이는 성당 부속 건물의 외벽, 햇볕과 비에 바랜 콘크리트 벽이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가니, 그 위에 희미한 연필 자국 같은 글씨들이 보였다.
정리되지 않은 문장들, 삐뚤빼뚤한 글씨, 누군가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 있는 말들. 처음엔 장난인가 싶었지만, 한 줄 한 줄 읽다 보니
그 글씨들이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기도이자 기록이자 삶의 흔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1. 벽에 새겨진 기도들
벽 한 귀퉁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주님, 아버지가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성모님, 저희 집 좀 도와주세요.”
그 옆에는 다른 누군가의 글씨가 겹쳐 있었다.
“군대 가는 아들 위해 기도합니다.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세요.”
다소 거칠게 눌러 쓴 글씨와 틈틈이 이어진 날짜들.
매주 한 줄씩 더해졌을 것 같은 필체.
아마도 성당에 들를 때마다 그 마음을 한 줄씩 남겼던 걸까.
글씨는 누가 지워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 꾸며 놓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벽에 남겨져 있었다.
어쩌면 그 누군가는 말보다 글이 더 간절했을지도 모른다.
목소리는 떨렸을지 몰라도, 손끝은 분명했다.
2. 누구의 글씨일까, 어떤 기도였을까
그 글씨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었다.
서명을 하거나, “누구누구 올림” 같은 말도 없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 익명의 기도들은 오히려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이름을 몰라도 마음이 느껴졌고, 얼굴을 몰라도 정이 갔다.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이랬다.
“성당 종소리 들으니 엄마 생각납니다. 여기도 잘 울리네요.”
한 줄의 문장. 그 안에 담긴 그리움과 위로.
지나가는 글자일 뿐인데도, 한참을 서서 다시 읽고 또 읽게 되었다.
나는 가만히 손을 벽에 얹어 보았다.
차갑고 거친 시멘트 감촉 너머로,
마치 누군가의 손이 거기 남아 있는 것처럼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다.
3.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요즘은 많은 성당이 리모델링을 하고, 벽면도 깨끗하게 정돈한다.
그런 흔적들은 종종 ‘미관을 해치는 낙서’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날 본 그 벽은, 마치 벽돌로 만든 노트 같았다.
시간과 마음이 함께 쌓인 기도장이었고, 작은 제대 같기도 했다.
나는 관리자 신부님께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저 벽 글씨들, 혹시 일부러 남겨두신 건가요?”
신부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예전부터 있던 글씨예요. 다들 성당 뒤에서 조용히 기도하시고, 그냥 한 마디씩 남기고 가시더라고요.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지우기가 어렵더라고요. 이게 또... 기도 같아서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성당을 떠나던 길.
마음속에 이렇게 새겨졌다.
기도는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흔적으로도 남는다.
그리고 그 흔적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다시 시작할 용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