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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성당의 책꽂이에서 만난 1984년 묵주기도서

by mcstory7 2025. 5. 25.

나뭇잎과 성경사진

1. 오래된 책꽂이 앞에서 우연히 멈춘 발걸음

시골 성당은 참 조용했습니다.

나무 바닥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마저도 잠시 후엔 익숙한 정적이 되었습니다. 성당 안을 둘러보다가, 구석 책꽂이 앞에서 문득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낡고 바랜 책들이 줄지어 꽂혀 있었고, 그중에서도 유난히 빛이 바랜 갈색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손에 쥐자, 헝겊 표지가 바스락 소리를 냈고, 표지엔 금박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묵주기도서」 – 1984, 가톨릭출판사

표지를 넘기자마자 펜으로 적은 손글씨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머니가 늘 들고 다니시던 책잃어버리지 말자.”

이 짧은 한 줄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누군가의 일상이 담긴 그 문장이, 그 순간 저에게 기도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나는 그분의 시간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2. 시간이 깃든 기도, 묵주의 문장들

묵주기도서는 단지 기도문을 모아둔 책이 아니었습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1980년대 특유의 인쇄체와, 옛 맞춤법이 보였습니다. “성모 마리아시여와 같은 표현들이 당시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죠.

특히 감동적이었던 건, 페이지 곳곳에 연필로 적힌 작은 메모들이었습니다.

오늘은 남편을 위해 바친다.”

둘째 아이 수술 날주님, 도와주소서.”

이 기도서는 단순한 종이 묶음이 아니라, 기도로 쌓아 올린 작은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1984년에 멈춰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3. 낡았지만 살아있는 기도의 숨결

요즘엔 휴대폰 앱으로도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고, 성당마다 깔끔하고 새롭게 인쇄된 기도서들이 잘 비치되어 있죠.

하지만 제 손안의 이 기도서는 달랐습니다.

종이 가장자리는 누렇게 바랬고, 몇몇 장엔 커피 자국 같은 얼룩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엔, 누군가 오랫동안 간직한 마음의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책 곳곳에는 연필로 조심스레 적은 메모들이 보였습니다.

오늘은 큰딸을 위해

주님, 남편 수술 잘 되게 해 주세요.”

이 기도서가 누군가의 하루를 어떻게 감싸주었을지, 상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4. 오늘, 당신의 묵주는 어디 있나요?

성당에서 돌아오는 길, 문득 가방 속 묵주가 떠올랐습니다.

얼마 만에 꺼내보는 걸까.

우리는 너무 자주 잊고 삽니다. 신앙을, 기도를, 그리고 그 오랜 시간 우리를 지켜준 사랑을.

혹시 당신도 집 어딘가에 오래된 기도서 한 권이 잠자고 있다면, 오늘 한 번 꺼내보세요.

1984년의 묵주기도서처럼, 그 안에는 지금도 살아있는 누군가의 기도가, 그리고 하느님의 숨결이 조용히 머물고 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