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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공소의 역사: 박해 속에서 피어난 신심

by mcstory7 2025. 5. 13.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을 거닐다 보면, 오래된 마당 저쪽 골목 어귀에서 종소리도 없이 조용히 서 있는 작은 건물을 발견하곤 합니다.

바로공소(公所)’입니다. 웅장한 성당도,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도 없지만, 그 안에는 몇 세대에 걸쳐 이어진 깊고 단단한 소박한 신앙의 향기가 배어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공소는 단순한 예배 공간을 넘어, 한국 신앙사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 유산입니다. 공소는 성직자가 상주하지 않는 지역에서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하며 신앙생활을 이어온 공간으로, 본당 성당의 작은 지체로 불리곤 합니다. 하지만 그 작은 지체가 지탱해낸 시간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욕지공소사진

 

1. 성직자가 없던 시대, 신자들이 만들어낸 신앙의 울타리

18세기 말, 조선 후기에 천주교는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조심스레 전래되었고, 많은 이들이 신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성직자들은 입국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모임을 만들고, 함께 기도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생겨난 것이 바로 공소입니다. 공소는 처음에는 신자들의 집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아 작은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누군가는 기도문을 읽었고, 누군가는 찬송을 이끌며, 모두가 함께 신앙인답게살아가고자 애썼습니다.

공소는 신부님이 한 달에 한 번, 혹은 몇 달에 한 번 들를 수 있을 때만 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외의 시간에는 공소 예절을 통해 하느님과의 연결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예절은 단순히 형식적인 기도 이상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려는 고백이었고, 박해 속에서도 굳건히 지켜낸 신앙의 실천이었습니다.

 

2. 피와 눈물로 지켜낸 공동체의 연대

역사를 살펴보면 공소의 자리는 곧 순교의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신자들은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도 밤낮없이 모여 기도하고 서로를 돌보았습니다. 박해 시대의 공소는 단순히 종교 모임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웃 공동체의 피난처였습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신부님 없이도 신자들이 스스로 신앙을 지켜냈다는 사실입니다. 공소 회장께서 공동체를 이끌고, 어린아이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병든 이들을 위로하며, 함께 농사짓고 밥을 나누는 삶.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교회였고, 정말 살아 있는 신앙의 현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지금도 살아 있는 공소의 숨결

오늘날에도 전국 곳곳에는 약 1,500여 개의 공소가 존재합니다. 특히 시골 마을이나 섬 지역에선 여전히 공소가 신앙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공소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고, 어떤 곳은 세 명, 네 명의 고령 신자들이 매일같이 성모님 상 앞에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사람이 줄어 성당으로 통합되는 경우도 많지만, 공소의 영적 의미는 여전히 소중합니다. 바쁜 도시생활 속에서도, 이런 공소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마음 한켠이 따뜻해집니다. 화려한 미사곡도, 신부님의 강론도 없지만, 그 조용한 예배 안에는 깊은 기도와 진심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