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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문지기 강아지 ‘복실이’ 이야기 복실이를 처음 본 건 어느 맑은 주일 아침이었습니다.성당 입구 돌계단 한쪽에 하얀 털뭉치가 동그랗게 누워 있었어요.처음엔 웬 인형인가 했죠.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자 고개를 들더니 꼬리를 살짝 흔들더군요.“복실이예요.”옆에서 지나가던 자매님이 말해주셨습니다.“성당 마당 지키는 우리 강아지예요. 신부님보다 먼저 와요.”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미사에 올 때마다 저도 모르게 복실이부터 먼저 찾게 된 게.1. 아침마다 제일 먼저 오는 친구복실이는 정말 일찍 옵니다.해가 겨우 떠오를 무렵이면 벌써 성당 마당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요.현관 앞 돌계단 옆이나, 나무 그늘 밑, 혹은 성모상 아래.자리를 바꿔가며 사람들을 지켜봅니다.교우들이 하나둘 도착할 즈음,복실이는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사람을 한 번씩 바라봅니.. 2025. 5. 22.
본당 밭에서 자라는 감자와 믿음 “신부님, 감자 싹이 났어요!”교리가 끝나고 한 아이가 소리치며 뛰어오던 그날을 아직도 기억합니다.성당 마당을 돌고 돌아서 예배당 뒤편으로 가보니, 정말 한 줄, 두 줄 초록빛으로 빛나는 감자 싹이 땅을 박차고 나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햇볕이 따뜻하게 내려앉아 아직 물기가 있는 흙 위로마치 손가락처럼 쏙쏙 올라온 감자싹들이 한껏 웃고 있었습니다.그날은 그냥 밭을 한 바퀴 둘러본 것 뿐이었지만,왠지 마음이 꽉 찬 느낌이 들었습니다.무언가를 심고, 자라고,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이 공동체에게는 작은 기적 같았거든요.1. 감자를 심던 날, 삽질보다 많았던 웃음소리햇살이 따뜻하게 퍼지던 오후 어느 날.성당 마당 한쪽에 있던 잡초 가득한 땅을 정리하고,본당 신부님과 신자들이 함께 감자심기를 시작했습니다.누군가는 호.. 2025. 5. 22.
미사복을 직접 손바느질하는 할머니 성당을 다니다 보면 성가대의 목소리, 제대 위 촛불의 흔들림,주일마다 다른 꽃꽂이처럼 눈에 띄는 것들이 있습니다.하지만 정말 잊지 못할 풍경은,늘 조용히,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손끝으로 이어지는 기도입니다.우리 본당에는 미사복을 손바느질로 지어주시는 할머니 신자 한 분이 계십니다. 흰머리가 가득한 할머니는 지난 30년간 성탄절 미사복, 어린이 세례 예복, 부활절 제대보까지 모두 혼자 바느질해오신 분입니다.그분의 바늘 끝에는 단순한 실이 아닌, 기도와 기억, 그리고 깊은 신앙의 시간이 꿰매어져 있습니다.1. 미사복 한 벌에 담긴 사계절의 시간“신부님 미사복 고칠 때는 손이 많이 가요. 그냥 옷이 아니거든요.”나는 어느 날, 사제관 옆 작은 작업실에서 할머니의 손길을 처음 보았습니다. 작업실이라고.. 2025. 5. 21.
논두렁 길을 걷는 순례자의 기도 우리는 가끔 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조용한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합니다. 누구의 시선도, 소음도 없는 곳. 오로지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을 그리며...그런 마음으로 떠난 여행에서 나는 어느날 한적한 시골 논두렁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지도에조차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좁은 흙길이었지만, 그 길 위에서 나는 기도의 참된 의미를 다시 배웠습니다.어떤 화려한 성지도 아니었고, 특별한 성당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걷는 동안, 나는 분명 하느님과 단둘이 걷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1. 마을 끝 논두렁에서 시작된 느린 발걸음햇살이 유난히 부드러웠던 봄날, 나는 작은 시골 성당에서 미사를 마친 뒤, 마을 너머로 이어진 논두렁 길을 따라 아무런 생각없이 걸었습니다.양옆으로 펼쳐진 논은 .. 2025. 5. 21.
일본 공소의 침묵과 고요, 그 안에서 피어난 신앙 일본의 시골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 속에 아주 소박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화려한 간판도 없으며, 종소리도 들리지 않지요. 하지만 그 안은 단순한 건물이 아닙니다. 그곳은 누군가에겐 하루의 시작과 끝을 기도로 채우는 자리이며, 하느님과 가장 깊이 만나는 성스러운 공간입니다. 바로 일본 천주교의 ‘공소’(講所, こうしょ)입니다.일본의 공소는 대부분 인구가 적은 외딴 시골 마을이나 산 속에 있습니다. 사제가 자주 머물 수 없는 환경이기에, 신자들은 스스로 기도 모임을 이어가며 신앙을 지켜냅니다. 어떤 곳은 주일마다 몇 명의 신자가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고, 어떤 곳은 한 노인이 홀로 공소 문을 열고 성경을 읽으며 그 자리를 지켜냅니다.그 무엇보다 인.. 2025. 5. 20.
아프리카 공소 성당에서 피어난 생명의 찬양 며칠 전,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지인을 통해 아프리카 어느 마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름도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작은 마을. 그곳에, 흙벽으로 지어진 공소 성당 하나가 있다고 했습니다.전기도, 마이크도, 심지어는 의자도 부족한 그곳. 하지만 매주 주일이 되면 사람들은 그 조그만 성당으로 모여든다고 하더군요.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곳이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왠지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1. 소리 없는 땅에 울려 퍼지는 첫 번째 박수공소에 들어서면, 정적이 먼저 반깁니다.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손뼉을 칩니다. 따라오는 북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노랫소리.가난한 마을의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이 찬양은, 마치 누가 그들에게 생명을 다시 불.. 2025. 5. 20.